영국의 대저택을 관리하는 스티븐스 집사는 주인의 권유로 6일간 영국 서부지방을 여행하며 지난 과거에 대해 회상하게 됩니다. 이 소설의 뼈대는 3가지로 나뉘어 있는데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그리고 스티븐스 집사가 일했던 달링턴 저택에서 있었던 외교모임들, 마지막으로 달링턴 저택에서 같이 일했던 켄턴 양과의 일들입니다. 


여행을 하며 여유 시간을 갖게 되자, 매일 성실하게 살던 지난 날들을 비로소 되돌아 볼 수 있게 된거죠. 위대한 영국, 위대한 귀족과 품위있는 집사들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과연 이렇게 사는게 옳았던 건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스티븐스 집사가 소설 첫머리부터 강조했던 건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입니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중략) 위대한 집사들의 위대함은 자신의 전문 역할 속에서 살되 최선을 다해 사는 능력 때문이다. (중략)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 p. 58


스티븐스는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 평생동안 충성을 다합니다. 자신이 세계사의 수레바퀴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달링턴 저택에서 있었던 외교모임이 세계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책 후반부로 가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스티븐스 집사가 섬겼던 달링턴 경은 히틀러에게 조종을 당해 영국에 히틀러를 위한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을 수행했던 거죠. 결국 스티븐스 집사가 빈틈없이 수행했던 일들은 나치를 돕기 위한 모임이었던 것입니다.


스티븐스 집사는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느라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켄턴 양에게 애정을 느꼈으면서도 집사로서의 의무와 직업정신때문에 켄턴양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눈 앞에서 잘못된 일들이 벌어지는데도 의문을 품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마치 개미처럼 주어진 일만 성실하게 해내면 되는 걸까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이 모든 일들을 회상을 하며 남아 있는 나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하면 허망해질 뿐입니다. 뒤늦게 켄턴 양과의 재회를 꿈꾸지만, 켄턴 양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택했습니다. 불의를 참았던 과거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합니다. 


여행 마지막에 들른 시골 마을에서 해리 스미스라는 농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요. 이 대화에서 해리 스미스의 대사는 모두 옮겨 적고 싶을 정도로 스티븐스 집사의 삶과 해리 스미스의 삶은 정확히 대조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노예 상태에서는 결코 품위를 갖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싸운 이유도 그거고, 우리가 마침내 얻은 것도 바로 그겁니다. 우리는 자유 시민으로 살 권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신분이 무엇이냐, 부자냐 가난뱅이냐를 떠나서, 영국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일종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마음껏 표현하고 투표로 의원 나리들을 의사당에 앉혔다 빼냈다 할 수 있으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 그게 바로 진정한 품위입니다. p.230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평생에 걸쳐서 위대하고 품위있는 집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말에 스티븐스는 당황하게 됩니다. 


저는 지지를 받든 못 받든, 사실 이 방에 앉아 있는 사람 중에서도 제 말을 '모조리' 지지하는 사람은 없는 줄 압니다만, 최소한 사람들에게 생각하게끔 만들겁니다. 각자의 의무가 무엇인지 일깨워 줄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싸웠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 p.236


마침 지방선거가 있던 기간에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저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묵묵히 내 일만 하면 되는 것인지 자문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침묵은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품위를 갖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는 일본에서 태어나 6살에 영국으로 이주하여 영국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입니다. 이 소설도 영국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귀족문화와 유서깊은 저택,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일으킨 일들에 대해 과연 옳은 일을 한 것인지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치인들이 내린 결정에 침묵하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완벽하게 본인들의 일에 충실했던 사람들에게, 과연 그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를 비판적으로 묻고 있는거죠.


스티븐스 집사는 농담을 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새로운 주인을 위해 농담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끝을 맺습니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 농담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 아닐까요? 노예나 로봇도 농담을 할 줄 모르겠지요. 


스티븐스가 속해 있는 위대한 집사의 세계도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은 철저히 무시하고, 주인의 지시대로 행동해야 하는 세계입니다. 나치 하에서 충성을 다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농담을 하지 못하는 로봇과도 같은 상태. 이 부분이 중요한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아있는 나날은 부커상 수상작이고,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술술 읽히는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실제로 스티븐스 집사가 달링턴 저택에 살면서 초상화의 먼지를 털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한 묘사와 에피소드가 잘 어우러져 있는 수작입니다. 회상하는 장면이 많아 자칫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지만, 현실과 과거가 잘 맞물리면서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요즘 케이블 TV 에 영국의 유서깊은 저택을 청소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하는데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TV 에 나오는 오래된 저택을 떠올리며 읽었더니 더 생생하게 와 닿았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4-01-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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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롤링맨 2015.02.09 1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리뷰입니다. 저랑 똑같이 느끼셨네요. 서정적인 가운데 은근히 냉철한 비판이 담겨있는 소설같습니다.

    • Favicon of http://www.happyblog.kr BlogIcon 열심히 2015.02.10 10: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사합니다^^ 남아있는 나날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저도 참 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리뷰를 쓰는건 정말 어려운 일 같아요..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은데 그걸 글로 옮긴다는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주절주절 떠들어 놨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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